동네 골목길 구제금융
전당포는 찾고자 하는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
전당포는 그 이름도 고색창연하다. 이발소가 바버샵(barber shop)이 되고, 미장원이 헤어·뷰티 살롱(hair·beauty salon) 따위로 진화하는 이 시대에도 전당포는 여전히 전당포다. ‘가게 포(鋪)’ 자가 붙은 이름으로 가끔 지물포·시계포·자전거포 따위가 쓰이긴 하지만, 이는 케케묵은 부름말일 뿐 그걸 상호로 쓰는 데는 없다. 오래된 가게라는 뜻으로 쓰이는 노포도 마찬가지다.
지물포는 지업사로, 시계포나 자전거포는 포 자를 떼어낸 상호를 쓰고, 손님들도 포 대신 시계방과 자전거방에 더 익숙하다. 그러나 전당포는 예나 지금이나 전당포다. 사양길로 떨어지던 전당포가 새로이 성업 중이라 해도 아이티(IT)나 명품·럭셔리, 귀금속처럼 취급 품목을 앞세울 뿐 전당포라는 업종을 떼어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전당포, 독립운동가도 이용했다
전당은 “재화의 유통에 있어서 채권의 담보로서 채무자가 유가물을 채권자에게 유치시키는 것”(『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다. 당연히 전당포는 “전당을 잡고 돈을 꾸어 주는 것을 업으로 삼는 영업소”다. 그리고 “전당업은 일종의 사금융업”(앞의 사전)이다.
국내에서 전당포가 처음 등장한 것은 1365년 고려 공민왕 때다. 왕후의 명복을 비느라 수시로 여는 대규모 불사의 비용을 조달하고자 왕실에서 직접 전당포를 열어 운영했다. 그러나 근대적 전당업이 발생한 것은 토지의 사적 소유가 가능해지고 금속화폐가 본격적으로 유통되던 조선 후기 이후다.
이 시기의 전당포에선 토지와 집문서와 같은 부동산, 비녀와 가락지 등 패물, 의복과 솥 등 가재도구 등 쓸 수 있는 모든 물건이 담보물이 될 수 있었다. 이후 전당업은 개항과 함께 은행이 들어오고 일본의 상업자본이 밀고 들어오면서 급격히 발전했다.
개항장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고리대금업을 벌이며 국내 전당업 시장을 쉽사리 장악해 버렸는데 이들은 영업으로 토지의 취득에 주력했다고 한다. 해방 후 제정된 전당포영업법은 부동산을 ‘전당물에서 제외’했다. 1999년 전당포영업법이 폐지된 뒤 전당포는 ‘대부업 등의 등록 및 금융이용자 보호에 관한 법률’(대부업법)의 적용을 받게 됐다.
전당포는 찾고자 하는 사람의 눈에만 띈다. 여전히 전당포를 찾는 사람은 있다.
서민들이 어떤 방식으로 전당포를 이용했는가는 살피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망명지 중국 땅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전당포를 이용한 사례로 그 모습을 추정할 수 있을 듯하다.
실제로 독립운동가들의 자서전에는 빈번하게 드러나고 있다. 임시정부에서 한때 백범 김구의 경무국 경호원으로 일한 적이 있었던 나석주(1892~1926) 의사는 1925년 8월 많은 양의 고기와 채소를 사서 백범을 방문했다. 그는 그날이 백범의 생신이 아니냐며 “돈은 없고 해서, 의복을 전당하여 고기 근이나 좀 사 가지고 밥해 먹으러 왔”다고 한다.
나석주 의사는 이듬해(1926) 베이징으로 가 의열단에 가입했고 그해 연말에 서울의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졌다. 자결하려다 중상을 입은 그는 이름과 의열단원임을 밝히고 순국했다. 백범은 자서전 『백범일지』에서 이 사실을 밝히며 “가장 영광스러운 대접을 받은 것을 기념할 결심”으로 “죽는 날까지 생일을 기념하지 않기로 하고 날짜를 기입”하지 않는다고 썼다.
1921년 현진건이 쓴 단편 소설 「빈처」의 도입부에는 가난한 무명작가인 남편의 서술로 이들 부부의 고단한 삶이 드러난다. 이들은 역시 전당국에 기구와 의복을 맡김으로써 땟거리를 마련해야 하는 처지다.
독립투사든, 시정인이든 전당포를 이용하는 목적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주림의 고통은 인간의 기본적 삶을 규정하는 옷과 집보다 훨씬 직접적인 데다 생존을 좌우하는 상수다. 식(食)은 의(衣)와 주(住)를 앞서니 그것을 버림으로써 얻어지곤 했다는 얘기다.
‘흑역사’ 속의 전당포, 그 부침과 성쇠
이용자로선 물건을 잡히고 돈을 꾸는 게 그리 자랑스러운 일이 아닌지라 전당포는 으슥하고 외진 골목길에 깃들었다. 삐걱대는 나무계단을 올라 2층 전당포 안으로 들어서면 구치소 면회실처럼 쇠창살이 달린 유리창 저편에 전당포 주인이 그림같이 나타나곤 했다.
흥정은 즉석에서 간단하게, 그러나 늘 고객에게 불리하게 끝나고 전당표와 현금을 받으면 일정 기간 안에 소정의 이자와 함께 원금을 갚으면 담보물을 찾을 수 있었다. 담보물의 변천은 시대 발전과 그 궤를 같이했다. 해방 이후엔 양복과 구두 등 입성부터 재봉틀과 라디오 등 값나가는 가재도구 중심이었다.
공업화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1970~80년대엔 텔레비전, 녹음기, 비디오 리코더, 비디오카메라 등이 주요 담보물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반지나 목걸이, 팔찌 등 금붙이와 고급시계 등 결혼 예물도 심심찮게 저당 잡히었다.
서민들에게 맞춤한 대출창구 노릇을 했지만, 전당포를 바라보는 일반의 눈길은 그리 탐탁지는 않았는데 이는 서구에서도 비슷했던 것 같다. 어디에서나 도스토옙스키 장편 소설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니코프가 도끼로 이웃 전당포 노파자매를 살해하는 사건을 바라보는 정서는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전당업은 제2차 석유파동(1978~1981) 시기에 최대 호황을 누렸지만, 의료보험의 전면적 시행(1989)과 가계수표와 신용카드 등 신종 금융상품이 등장해 손쉽게 돈을 빌려 쓸 수 있게 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사회 초년생 시절에 나도 신용카드로 현금 서비스를 이용하곤 했는데 그건 무담보, 신용만으로 소액을 대부받을 수 있는, 그야말로 최고의 금융상품이었다.
‘골목길 구제금융’, 고단한 삶처럼 이어질까
가계에서 목돈이 긴요해지는 때는 가족이 병이나 사고로 입원할 때 드는 의료비나 자녀의 대학 입학에 따른 학자금 수요 등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의료보험과 신용카드는 그런 목돈 수요를 전당포를 거치지 않고 해결해줬다. 전당포의 사양길은 산업사회의 발전의 피할 수 없는 추세처럼 보이는 이유다.
거의 바닥을 치는 듯했던 전당포가 기사회생한 것은 이른바 명품전당포, 아이티(IT)전당포가 서울의 강남 등 주요 상권에서 발생한 대부 수요에 응답한 결과였다. 이들 전당포에서는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노트북 등 전자제품이 주로 거래된다. 값비싼 명품 옷과 가방, 시계와 액세서리 등도 거래 품목에서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이는 결국,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지역, 고도 소비가 이뤄지는 번화가 주변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서울에서도 주요 상권과 거리가 있는 지역의 전당포는 여전히 문을 열고 있을 뿐이지 예전과 같은 호황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아무리 촘촘한 사회복지망도 충격적인 ‘아사의 비극’을 비켜 가긴 어렵다. 세상은 때로 우리의 상상을 간단히 뛰어넘을 만큼 복잡하고 모순적이지 않은가. 전당포가 명맥을 이어가리라 예측하게 하는 근거다. 은행과 제2금융권은 물론, 고리의 대부업체조차도 이용할 수 없는, 수백 가지 사연을 가진 이들에겐 여전히 전당포가 만만한 대출 창구인 까닭이다. 그렇다. 전당포를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이들의 고단한 삶이 이어지는 한, 전당포는 ‘골목길 구제금융’으로 남아 있지 않겠는가.
- 직썰 필진 낮달 - 님의 글에서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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